르노삼성자동차가 뉴SM5(L43)의 가격을 동결해야 하는 이유

 


르노삼성의 SM5는 현대자동차 소나타에 비해 ‘고가 (高價) 전략’을 펴온 게 사실입니다. 1세대 SM5 출시 시점부터 동급 소나타에 비해 높은 품질을 제공하며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매김해온 것이 사실이구요 (쉽게 말하자면 적게 팔더라도 대당 이익이 높은 ‘폭리소매’ 구조였죠).

 
하지만, 이번 뉴SM5 (코드명 L43) 출시의 경우는 이전과 상황이 다를 수 있을 듯 싶네요. 이번 뉴SM5의 가격 책정에 있어서 첫번째로 고려될 요소는 캠리 (Camry)의 국내 출시이고, 둘째는 YF소나타 출시 후 국내에서 번지고 있는 국산차 가격거품 논란, 세번째는 개방되고 있는 국내 자동차 시장의 상황입니다.

 

도요타 캠리의 절묘한 가격 전략 

 

캠리 출시 이후 국산차들은 줄줄이 캠리의 차값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캠리 리미트’ (Camry limit)에 걸려있는 상황인데요. 2010년 1월 뉴SM5 이후 2010년 내 SM7 후속 차량의 출시를 예정하고 있는 르노삼성 입장에서도 지나친 가격 인상은 현실적으로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네요.

 

뉴SM5의 가격을 종전처럼 YF소나타보다 200만원 가량 높게 책정할 경우, 최고급형은 캠리와 가격 차이가 얼마 나지 않게 되고, 1단계 더 높은 세그먼트의 SM7의 가격은 캠리를 훌쩍 뛰어넘게 되죠. 캠리와 얼마 차이 안 나는 뉴SM5, 그리고 캠리보다 비싼 SM7, 얼마나 잘 팔릴까요?

 

또한 이번에 국내에 출시된 캠리는 2006년형이지만, 2011년경에 풀체인지된 ‘신형 캠리’가 출시될 예정입니다. 헌데 도요타 (Toyota)는 이전에 혼다 (Honda)나 닛산 (Nissan)이 한국에서 환율 연동해서 가격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고무줄 가격 전략을 취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요타가 한국에서 캠리를 출시한 것은 현대-기아자동차 ‘본진 공격’의 의미를 더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요타는 한국에서 취한 폭리를 바탕으로 글로벌 마켓에서 강력한 마케팅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현대-기아차의 전략을 꿰뚫어보고, 캠리의 가격과 출시 시기를 전략적으로 조율한 것으로 보입니다).

 
2011년경에 풀체인지된 신형 캠리가 현재의 가격 선인 3,490만원대로 출시된다고 생각해보세요. YF소나타, 뉴SM5, K7, K5 (로체 후속), 그랜저 후속, SM7 후속 등 현대-기아차와 르노삼성의 주력 차종들은 모두 ‘신형 캠리’ 출시 이후 국내 시장에서 상당히 고전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자기 덫에 걸린 YF쏘나타

 

반대로 현대-기아자동차는 ‘캠리 리미트’와 ‘소나타 리미트’ (Sonata limit)에 동시에 걸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캠리보다 먼저 출시한 YF소나타는 디자인을 sporty하게 가져 가면서 프리미엄 브랜드로 포지셔닝하고자 가격을 상당히 끌어 올렸습니다. 문제는 YF소나타 출시 이후 도요타 캠리의 국내 출시 가격을 예상치 못한 점이었습니다.

 

현대-기아자동차가 ‘소나타 리미트’에 걸렸다는 것은, YF소나타의 가격을 비싸게 책정함으로써, 그보다 세그먼트가 위인 K7과 그랜저 후속의 가격도 그에 맞춰 높게 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젠 내리고 싶어도 스스로 책정한 YF소나타의 가격정책에 걸려 마음대로 못 내린다는 얘기죠.

 

12월로 SM5 출시를 예정했던 르노삼성이 '연식 문제로 소비자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납득 가지 않는 핑계를 대면서 한달 가량 출시를 연기한 데에는 이런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르노삼성자동차, SM5의 가격을 어떻게 책정할 것인가?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르노삼성은 어떤 가격정책을 펴게 될까요? 현재의 SM5 가격을 ① 인하한다 ② 유지 (동결)한다 ③ 인상한다, 3가지 선택이 있겠죠.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는 성능이 개선된 차량의 가격을 더 싸게 내놓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만약 더 싸게 내놓는다면, 뉴SM5는 대박이 날 가능성이 높겠죠. 르노삼성의 국내 시장 점유율도 급반전할 가능성이 높구요. 하지만, 한국 자동차 시장에서의 르노삼성의 행태를 되돌아보면, 차값 인하를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르노삼성의 선택은, 가격을 인상하거나 동결하거나 둘 중 하나로 보여집니다. 캠리와 YF소나타 출시 이전의 상황이라면, 르노삼성의 고민도 많지 않았을 겁니다. 예전처럼 고가 전략을 취했을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문제는, 캠리와 YF소나타가 예상치를 벗어난 낮은 가격과 높은 가격으로 각각 출시되면서 국내 자동차 시장의 지형도가 급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격을 인상할 것인가? 가격을 올린다면 얼마나 올릴 것인가? 

 
먼저 인상하는 방안입니다. 얼마나 올릴 수 있을까요? 이전처럼 YF소나타에 200-300만원을 더 얹는 방식? 이미 SM5 임프레션 풀옵션의 가격은 3,045만원 정도 됩니다. 기존 SM5 임프레션의 가격에 200-300만원을 더 얹으면 캠리 가격에 거의 근접하는군요. 캠리가 아무리 렉서스가 아닌 도요타의 대중 차종이라곤 하지만, SM5와 YF소나타에 비길 바는 아닙니다.

 

게다가 뉴SM5의 최고 트림을 캠리와 거의 비슷한 가격으로 책정하면, 내년에 출시 예정인 SM7은 캠리를 훌쩍 뛰어넘는 가격으로 책정되어야 합니다. YF소나타 고가 책정으로 스스로 가격 마지노선을 그어 버린 현대-기아차의 전철을 밟게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신차 출시 때마다 차값 대폭 인상으로 ‘폭리’를 취하고 있는 현대-기아차와 똑같은 비판에 직면하겠군요.

 

그럼 YF소나타 가격 대에 맞추는 소폭 인상의 방법은 어떨까요? 소폭 인상을 택하는 경우에도 기존 SM5 임프레션의 트림 별 가격이 이미 만만치 않아, YF소나타 가격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거나 YF소나타 가격을 넘어서게 됩니다. 현대-기아차의 가격대에 ‘묻어가기 전략’을 취하면서 과거에 비해 얼마 올리지 않았다고 ‘생색’을 낼 수도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캠리 출시 이후 국내 자동차 회사들에 대한 고객들의 부정적 시선과 분노에 찬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헌데,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YF소나타의 고가 출시로 현대-기아차가 ‘패착’을 하긴 했지만, 아직 현대-기아차에게는 2010년 5월에 출시될 K5 (로체 후속)라는 ‘카드’가 하나 더 있습니다. K5는 YF소나타와 같은 세그먼트로 출시되는 제품이지만,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저가 정책’을 통해 중형차 수요를 흡수할 수도 있으니까요. 또다른 카드를 만지작 거리고 있는 현대-기아차를 두고 르노삼성이 어중간한 ‘묻어가기 고가 전략’을 취했다간 SM5 포지셔닝 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가격이 아니다 - 위협받고 있는 SM5 포지셔닝

 

개인적으로는 르노삼성이 뉴SM5 기종의 가격을 살짝 올리는 선에서 YF소나타의 고가 전략에 대응하면서, 옵션 선택의 폭을 넓혀 가격 인하의 효과 등을 제시하는 방법 등을 취할 가능성도 높아 보입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뉴SM5의 가격을 얼마로 책정할 것인가만 고민하면 되는 단순한 시기가 아닙니다. 경제 위기 속에서 GM 등 미국 자동차 회사가 몰락하면서 글로벌 자동차 시장이 급속하게 재편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자동차  시장도 EU, 미국 등과의 FTA 체결로 급속히 개방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르노삼성 역시 과거처럼 폐쇄적인 한국 자동차 시장에서 공급자 위주의 일방적인 가격 전략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며, 글로벌 4위권인 르노닛산 계열의 일원으로 글로벌 6위권인 현대-기아차에 대한 견제도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고 봅니다.

 

소나타, SM5, 토스카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폐쇄적인 시장에서는 만들기만 하면 차가 팔렸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고 봅니다. 과거 10년 동안 르노삼성의 경쟁 상대는 현대-기아차, GM대우 뿐이었지만, 앞으로는 다릅니다. 도요타, 혼다, 폭스바겐, 푸조, 포드 등 글로벌 자동차들과 한국 시장에서 직접적으로 경쟁하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소나타, 토스카 등과 경쟁하며 좀더 나은 품질 + 비싼 가격을 통해 ‘프리미엄 전략’을 구사해왔던 SM5가 과거와 같은 전략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위험한 전략이라고 봅니다. 도요타, 폭스바겐 등 글로벌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회사의 차량들과 경쟁하는 상황에서, SM5의 브랜드 파워는 ‘프리미엄’을 내세울 정도로 강하다고 보진 않기 때문입니다.  

 

SM5, '대중명품주의' 전략으로 나가야 한다

 

SM5의 전통적인 디자인 컨셉은 트렌디(trendy)함보다는 클래식(classic)함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YF소나타와는 상대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죠. YF소나타가 향후 ‘력셔리’한 축으로 브랜드 포지셔닝을 끌어 올리려고 합니다만, 솔직히 쉽지는 않다고 봅니다. 소나타가 주 공략 대상으로 삼는 미국 시장에서 소나타는 ‘저렴한 가격 대비 괜찮은 품질의 차량’으로 포지셔닝되어 있습니다. 품질을 더 끌어 올리고 디자인을 파격적으로 바꾼다고 해서, 소비자들의 ‘인식’을 바꾸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도요타가 렉서스 (Lexus)를, 닛산이 인피니티 (Infiniti)라는 별도의 프리미엄 브랜드를 만들어 시장을 공략한 것도 결국 이런 소비자들의 인식의 범주를 넘어서기 어려웠기 때문이구요.

 

각설하고, 개인적으로 저는 SM5가 향후 지향할 방향이 ‘대중명품’ (masstige)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품질 + 합리적 가격 + 서비스의 만족도 등을 결합하여 SM5만의 포지셔닝을 확고히 해야 할 상황이 왔다고 봅니다.

 

어줍잖게 럭셔리 (luxury) 또는 명품 (prestige)을 지향하며 고가를 책정하는 전략은 SM5의 포지셔닝에 치명적인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뉴SM5 차량의 가격 전략은 이런 복잡한 상황을 고려해서 책정이 되어야 한다고 보구요. 그런 맥락에서 이번 뉴SM5의 가격은 현재의 임프레션 가격 선에서 동결하면서, 옵션 선택의 자유도를 이전보다 높이면서 실질적인 가격 할인 혜택을 제공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으로 설정해야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르노삼성자동차는 한국 소비자를 얼마 짜리 고객으로 생각할까?

 

이번 뉴SM5 가격 책정은 단순히 르노삼성 차량 한 종의 가격을 정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르노삼성이 강력한 경쟁자인 현대-기아차에 맞서 어떤 전략을 취할 것인지, 그리고 국내 고객들에게 어떤 자동차 회사로 자리매김할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대량생산 체제를 통해 T모델을 출시하여 미국 자동차 시장을 석권했던 포드가 2위 업체로 추락했던 이유는, 고객들의 니즈에 맞는 브랜드별 자동차를 선보인 GM에 의해서였습니다.

 

후발주자인 르노삼성이 SM5를 통해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것도 괜찮은 품질에 대한 고객들의 성원 때문이었고, (SM5 임프레션 LPG 차량 결함으로 인한 강제 리콜 사건 이후) 2008년 1분기 르노삼성 매출이 급락했던 것도 품질 및 기술력 저하에 대한 고객들의 냉정하고 준엄한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렉서스는 고객 한 사람이 60만불의 고객생애가치 (customer lifetime value)를 가진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즉, 렉서스 자동차를 1대만 구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 구매를 통해 평생 동안 60만불 정도의 렉서스 제품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고객 만족’을 넘어 ‘고객 감동’으로 유명한 렉서스의 제품과 서비스는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기에 가능합니다.

 

현대-기아자동차는 국내 소비자들을 얼마 짜리로 봤을까요? 무상 보증을 겨우 넘길만한 품질, 고만고만한 AS…. ‘봉’으로 봤거나 우습게 봐왔다고 생각합니다. 품질이 더 나았다고 하는 르노삼성도 어찌보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뉴SM5 차량의 가격 책정은 르노삼성이 대한민국 자동차 소비자들을 얼마 짜리 생애가치를 지닌 고객으로 바라보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거라 봅니다.

 

한 번 털어먹고 말 ‘봉’으로 보는지, 평생 함께 갈 ‘고객’으로 생각하는지… 르노삼성의 이번 뉴SM5 가격 책정은, 그래서 정말 정말 기대되는군요.


* 이 글은 SM5 3세대 모델인 뉴SM5가 출시되기 한달 전인 2009년 12월 7일에 작성했던 글입니다. 한참이나 지난 글을 티스토리 블로그에 다시 옮겨두는 이유는, 이 글이 자동차에 대해 제가 작심하고 쓴 '첫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애착을 갖는 글이기도 합니다. ^^


Posted by library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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